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어 아도르노 (문단 편집) === 사회조사연구소와 미국 망명 === [[막스 호르크하이머|호르크하이머]]가 1930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과 정교수로 임명되는 동시에 사회조사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을 때, 아도르노는 사회조사연구소의 비공식 연구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교수자격 논문도 통과되어 대학에서 강의를 하려고 했으나 아도르노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소속되어야 했던 제3제국문화공무부의 회원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1933년 9월 11일, 30세가 되던 생일날, 나치는 아도르노의 강의허가증 마저 무효화시킨다. 독일에서의 생활을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이제 아도르노는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34년에서 1938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컬리지#Merton College (머튼 컬리지)|옥스퍼드 머튼 칼리지]] 박사과정 학생 자격으로 4년간 [[런던]]에 머물렀다. 이시기 아도르노의 자존심은 최악의 상태였는데, 몇 편의 글을 썼지만 영국의 지식 클럽 어디에서도 강연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옥스퍼드의 누구도 아도르노를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았고 그저 댄디(멋쟁이)로만 취급했다. [[수정의 밤]]으로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자, 호르크하이머는 아도르노에게 [[미국]]으로 넘어오라고 권유했고, 1938년 아도르노는 이를 받아들여 [[뉴욕]]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아도르노가 얻은 첫 직장은 프린스턴 라디오연구 프로젝트였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록펠러재단이 준 지원금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형식의 대중매체가 미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계획이었다. 아도르노는 이 프로젝트의 음악감독으로 고용되었다. 하지만 실제 업무는 프로그램 제작자에게 어떤 종류의 방송이 시청률을 극대화하는가에 대한 데이터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그는 이런 일에 회의감을 느꼈다. 그는 1941년 일을 그만두기 전까지, 이런 실증주의적 방식이 음악을 수량화시키고 청취자와 음악 그 자체의 관계를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결정되게 만든다는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상업라디오는 청취자에게 라디오가 제공한 상품음악만 선택하게 만들어, 청취자를 저질음악만 소비하는 수동적인 소비자로 만든다는 것이 그 비판의 요지였다. 일단 공식이 성공적이면 산업은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틀어대고, 그 결과 청취자는 똑같은 것만 듣고 그 형식이 대단한 것마냥 치켜세운다. 아도르노는 「플러깅 연구」라는 글에서 라디오 음악산업의 성공공식을 다음과 같이 비꼬았다. "밥그릇에 개밥을 쏟아 붓는 소리가 나면, 그것을 들은 개가 달려오는 것과 같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295] 1941년 4월 호르크하이머는 심장이 좋지 않아 온화한 기후에서 지내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같은 해 11월 아도르노 부부도 호르크하이머를 따라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 서쪽에 위치한 부촌 브렌트우드에 월세를 얻었다. 여기에는 나치의 핍박을 피해 도망쳐 온 망명 독일 지식인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토마스 만]], [[베르톨트 브레히트|브레히트]], [[아르놀트 쇤베르크|쇤베르크]], [[프리츠 랑]], [[한스 아이슬러]] 등등 저명한 예술가들이 이웃이었기 때문에, 당시 아도르노는 무명의 철학자에 불과했지만 그들 몇몇과 교류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대가들의 예술과는 대조적으로, 바로 옆 [[할리우드]]에서는 저질 영화를 일회용 상품처럼 대량생산하고 있었고, 아도르노는 문화마저도 산업화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정형화된 공식과 이미지들을 반복하여 무의미한 웃음을 안겨주는 할리우드 영화는, 여가와 오락를 제공하므로써 환상을 만들고 그 환상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효과적으로 숨겨주고 있었다. 사람을 돈으로 파악하고 돈이 권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 자본주의 문제점인데, 대중문화는 그 문제점마저도 마치 가벼운 일인양 웃어 넘기거나 도리어 매혹적으로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돈의 권위에 순응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러한 순응은 분명 권위친화적인 태도를 확산시키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아도르노의 생각이었다.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아도르노는 파시스트 프로파간다의 성공을 분석한다. 그는 이 분석에서, 나치의 프로파간다와 캘리포니아의 목사들이 라디오방송에서 한 설교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이 두 부류는 자신의 연설을 듣는 청중으로부터 권위를 얻어내기 위해 두 단계의 수사적 과정을 활용했다. 첫째, 자신의 나약함을 표명하면서 메시지를 듣는 나약한 청중과 동일시한다. 둘째, 자신이 선택된 소수의 한 사람임을 강조하면서 청취자들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면 이 소수에 동참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결국 성공한 선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범함을 강조하는 위대한 소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추종자들과 하나가 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 집단적 희망과 덕목을 강요할 수 있다. 아도르노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의 천재성은 "킹콩과 이발사를 결합시킨 태도를 보여주었다"[* 킹콩은 '위대한 사람'을 뜻하고, 이발사는 '평범한 사람'을 뜻한다.]는 데 있었다.[*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91] 이 심포지엄은 아도르노가 1947년에 연구한 '캘리포니아 F지표'로 알려져 있는 성격테스트 개발로 이어졌다. F지표(Fascist scale)는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탐색하기 위해 고안되었는데, 아도르노는 이 지표를 사용한 연구[* 총 2099명의 백인 중산층 미국인들이 질문지를 작성하였고, F지표에서 높은 점수와 낮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을 초청해서 좀 더 긴 평가면접을 시행했다.]에서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 연구는 1950년에 『권위주의적 성격』(The authoritarian personality)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됨.] 1947년은 또한 호르크하이머와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을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는, 자연을 지배하고자 발달된 인간의 이성(계몽)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을 넘어서서 도리어 인간 자신까지도 지배하게 되는 역설을 밝히고 있다. 가설에 의하면 가치중립적인 과학과 자본주의는 세상을 더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자연을 '수량화'한다. 나무를 있는 그대로의 나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땔감 1개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의 합리성이 극한으로 확대됨에 따라, 이성의 방법에 불과한 '수량화' 개념 그 자체가 역사적 환경이나 구체적 현실과 관계없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인 듯 믿어져 따르게 되고, 기어코 인간 자신에게도 이런 '수량화' 개념이 그대로 적용되어진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 아니라, 단지 '2명의 노동력'에 불과한 것으로 되버리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명의 노동력은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고 소모될 수 있는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된다. 즉,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자연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인간의 이성'을 발전시켜 왔으나, 결국 이 이성에 인간마저도 효과적으로 지배당하게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 인간의 자유는 사라져버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성의 지배가 인간을 향할 때, 우리는 '그 이성이 무엇을 희망하고 있었던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었다. 이성은 본래 인간의 자유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 '형식화된 이성'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한다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같은 비극은 언제든지 다시 반복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